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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조 (派祖)

 

전릉부원군 류의(柳儀)

 

 

상위 계보

 

시조    류    습(柳   濕)

 

2세     류극서(柳克恕)

 

3세     류    빈(柳   濱)

 

4세     류말손(柳末孫)

 

5세     류계장(柳季)

 

6세     류    헌(柳   軒)

 

7세     류세린(柳世麟)

 

8세     류   의(柳   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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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全州柳氏) 유래(由來)

                            

                  전주류씨(全州柳氏) 유래(由來)

 

   전주류씨 연원에 관한 기록으로는 효종3(1652)년에 창간한 임진보(壬辰譜) 본문(本文)의 맨 앞에 “류방직(柳邦直)은 고려 제도도부승이며, 아들 운(橒)은 고려 생원이다. 이 이상은 모두 문화에서 이어 나온 고려의 대승 차달(車達)의 후예로서 여러 대를 벼슬하여 나라의 큰 성씨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실전하여 능히 대를 잇지 못하고 습(濕)에 이르러 전주로 이주하여 그 읍호(邑號)를 본관으로 하고 자손이 시조로 삼았다. 또 직제학공의 묘갈문을 보면 운(橒)을 시조의 아버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오른 편의 2대(二代)는 별도로 족보의 머리에 기술(記述)하여 후일의 참고에 대비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전주류씨 4번째 대동보인 병자보(1876년)에는“전주류씨보계변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 아닌 토성(土姓) 전주류씨라 하였고, 미완성 대동보인 갑자보(1924년)에는“전주류씨보계변증반증문”을 수록하여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라 하고 있어 이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명종20(1565)년에 류희잠(柳希潜)이 최초로 발간한 문화류씨세보 가정보(嘉靖譜) 서문(序文)에 전주류씨 분관설이 없고, 전주류씨가 신라(新羅) 때부터 이어온 토성(土姓) 류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시조(始祖) 선대(先代)의 계대(系代)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시조 완산백 습(濕)의 상계(上系)는 토성설(土姓說)이나 문화류씨분관설(文化柳氏分貫說) 등을 향후 각파 종중에서 문헌이나 금석문 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첨언(添言)할 것은 전주류씨는 3개 파가 있다는 것이다. 즉, 혼(渾), 습(濕), 지(池)를 각각 시조로 하는 3개 파이다. 여기서 혼(渾)파는 신라 때 각간(角干)을 지낸 류기휴를 비조(鼻祖)로 하고 혼(渾)을 시조(始祖)로 하여 족보를 발간한 바 있으나 시조 혼(渾)의 상대(上代) 계대(系代)를 부친(父親)과 조부(祖父)는 성함(姓銜)이 없이 2대(代)를 실전(失傳)으로 기록하고 있어 모순(矛盾)된 족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전주류씨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생몰년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위 대제학 심효생(1349∼1398)이 고려 충정왕1(1349)년에 출생한 기록으로 보면 전주류씨는 약 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시조(始祖) 습(濕)은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극강(克剛), 둘째 아들 극서(克恕), 셋째 아들 극수(克修), 넷째 아들 극제(克濟), 막내아들 극거(克渠) 및 사위 심효생(沈孝生)아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따라서 고려 때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를 하면 나라 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시조비(始祖妣) 전주최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되고, 조선 초에 이르러 시조(始祖)의 시조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류씨(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 5형제 중 둘째인 극서(克恕)는 고려 말기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연안부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 초기에 영흥부사를 하였다. 빈(濱)의 아들 경손(敬孫)은 해주 판관을, 의손(義孫, 회헌공)은 세종 때 이조ㆍ예조참판을 하였고, 말손(末孫)은 순창군수를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말손의 셋째 아들로서 회헌공[의손]의 양아들이 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계동(季潼)의 큰아들 식(軾)은 인천도호부사를 지내고, 막내아들 곡(轂)은 전라도 고산현 현감으로 부임하여 고산현 율곡에 있는 시조 묘에 5대봉사(奉祠)의 차비를 차려 이를 모시도록 하니 오늘날 많은 자손들의 조상숭배에 귀감이 되었으며, 식(軾)의 큰 아들 윤덕(潤德)은 중종 때 예조참판ㆍ한성우윤을 지냈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간신배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사간원을 없애버리니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마지막 대사간이 되었다.

  헌(軒)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하는 상소를 하였으며, 증손 영길(永吉)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경(永慶)은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부친 의(儀)도 전릉부원군이 되었다.

  한편 묵계공 복립(復立)은 종부시(宗

簿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는데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던 외숙 경상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을 따라가 참모 역할과 함께 수문장(守門將)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진주성이 왜적(倭敵)에게 함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조생(肇生)은 호성공신으로서 부친, 아들, 손자 4대가 봉군(封君)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인조 때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진 영의정 영경(永慶)의 손자 정량(廷亮)은 사은사, 진향사로 청나라에 3번 다녀왔고 도총관에 이르렀으며, 전창군의 부친 열(悅)은 전원군에, 송설체(松雪體) 글씨에 능한 전원군 아들 심(淰)은 참판으로서 전평군에 봉해져 5대가 봉군이 되었다.

  인조1(1623)년에 알성급제한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 질(秩)은 병자호란 때 철원부사로서 청병에 맞서다 전사(戰死)하였으며, 청백리에 오른 경창(慶昌)은 사마시,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대사간에 이르렀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제자백가와 천문에 정통한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지었고 영순(永詢)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안동의 기봉공[복기]과 함께 실전(失傳)된 직제학공[극서] 묘소를 찾아 묘비를 세웠다. 영변부사를 지낸 정양(鼎養)은 문장이 뛰어나 고양시와 용인시에 있는 묵계공 비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중 선조(先祖)의 비문을 지었다.

  정조 때 순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한 의양(義養)은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수찬(修撰)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홍주목사로 선정(善政)을 베푼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완(玩)은 무과(武科)로 참령(參領)을 하였고, 정(珽)은 문과로 교리(校理)를 지냈다.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근(瑾)은 구한말(舊韓末)에 탁지부(度支部, 재무부) 주사(主事)를 하고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5대 황성신문사장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大倧敎)와 광문회(光文會)사업에 종사하였고, 휘문의숙장[교장], 중앙학교장을 하였으며,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이 되었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임(林)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인식(寅植)은 민족운동가/교육자로 활약하였고, 영(瑛)은 해방 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기수(驥秀)는 용인군 제2대 국회의원을 하였고 그의 손자 기홍(基洪)도 제17대, 19대 국회의원(서울 관악갑)이 되었다. 한편 치송(致松)은 제6, 9, 10, 11, 12대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냈으며, 그 아들 일호(一鎬)는 제18대, 19대 국회의원(서울 송파을)이 되었다.

  청(靑)은 전주고등학교장을 거쳐 제4, 5, 6, 8대 국회의원을 하고 전주류씨 문중에서 운영하는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기정(琦諪)은 제8, 9대 국회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회장을 하였다.

   전주류씨는 1360년경에 관향(貫鄕)인 전주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크게 번성하여 점차 인근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가 그중 일부는 관직을 따라 서울과 파주, 의정부, 광주, 이천, 용인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한편 영의정 영경(永慶)이 광해정변에 휘말려 일족이 화가 미치자 장단, 평창, 음성, 임실, 진주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강원감사를 지낸 계반(季潘)의 일부 자손들이 임진강변과 황해도, 강원도 내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에 61,650명[19,008가구]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주류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개파 즉, 혼(渾)파, 습(濕)파, 지(池)파가 있으므로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는 이보다 약간 적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