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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先祖全平君壬辰譜 吾門譜牒之始也 首書柳邦直高麗諸道都副丞 子橒高麗生員 아선조전평군임진보 오문보첩지시야 수서류방직고려제도도부승 자운고려생원 書其下曰 此以上皆系出文化 高麗大丞車達之後也 서기하왈 차이상개계출문화 고려대승차달지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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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조 전평군(全平君, 柳淰)의 임진년(1652년)족보가 우리 문중의 최초 족보이다. 머리에 “류방직(柳邦直)은 고려제도도부승이고 그 아들 운(橒)은 고려생원이다.”라 기록하고 그 아래에 이르기를 “이 이상은 모두 문화에서 이어 나왔으니 고려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후손이다”라 하고
奕世冠冕爲國大姓不幸失傳不能繼代至諱濕移居全州因貫其邑子孫以爲始祖譜旣成 혁세관면위국대성불행실전불능계대지휘습이거전주인관기읍자손이위시조보기성 宗中諸博洽掌故者通考文化晋州譜及姓苑雜出之書則自文化分貫之說謬誤不可徵信 종중제박흡장고자통고문화진주보급성원잡출지서즉자문화분관지설류오불가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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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나라의 큰 성씨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아 대를 잇기가 불가능하고 류습(柳濕)에 이르러 전주로 옮겨 살아 그 읍호를 본관으로 삼고 자손들이 습을 시조로 삼았다”는 족보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나 종중에서 박식(博識)하고 고사(故事)에 밝은 분들이 문화와 진주류씨 족보 및 다른 성시 족보에 여러 가지로 나오는 문헌을 살펴보니 문화류씨로부터 분관되었다는 설은 잘못되어 가히 믿을 수가 없다.
盖其說出於嶺南藏晋州譜以訛襲訛轉轉相誣壬辰譜成嶺嶺營校正之人多是嶺南宗人 개기설출어영남장진주보이와습와전전상무임진보성영영영교정지인다시영남종인 故北譜首之書也 고북보수지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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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영남지방에서 나온 곳으로 추측되는데 간직해 온 진주류씨 족보의 잘못된 것이 다시 거듭되고 변하고 변하여 서로 꾸몄으며, 임진보도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이루어졌으니 교정하는 사람이 영남의 일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 족보의 머리에 쓴 것이다.
僉正公錫昌與府使冕府使曼乃爲文以誘各派而辨之甚力故曁後第二譜第三譜遂闕譜 첨정공석창여부사면부사만내위문이유각파이변지심력고기후제이보제삼보수궐보 首之書也然則我柳不必曰本源於文化也不必曰伯仲於晋州也而首足全州之柳也 수지서야연즉아류불필왈본원어문화야불필왈백중어진주야이수족전주지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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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정 류석창(柳錫昌)이 부사 류면(柳冕) 및 부사 류만(柳曼)과 함께 글로서 각파(各派)를 깨우치고 밝히는데 온 힘을 썼기 때문에 그 후의 제2보(병오보)와 제3보(재병오보)에는 마침내 족보 앞머리의 글을 뺀 것이다. 이렇게 되니 우리 전주류씨는 반드시 문화가 본원이라 할 수 없고 진주류씨와 형제라고도 할 수 없으니 몸체는 바로 전주류씨인 것이다.
全州之柳顯於麗代者亦多焉有若平章事貞簡公柳邦憲平章事載肅公柳光植平章事莊 전주지류현어려대자역다언유약평장사정간공류방헌평장사재숙공류광식평장사장 定公柳韶俱載史傳及輿地勝覽今其子孫無傳焉 정공류소구재사전급여지승람금기자손무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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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 중에서 고려 때에 현달(顯達)한 분이 역시 많았는데 평장사 정간공 류방헌(柳邦憲), 평장사 대숙공 류광식(柳光植), 평장사 장정공 류소(柳韶)와 같은 분은 모두 고려사열전과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으나 그 자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我祖之於全州其爲移居與世居固不可知盖與三平章家同邑而同貫則人或疑之以南阮 아조지어전주기위이거여세거고불가지개여삼평장가동읍이동관즉인혹의지이남완 北阮然可往杞宋文獻之歎也 북완연가왕기송문헌지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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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조(류습)가 전주에 이사를 가서 살았는지 전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인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으나 대개 3인의 평장사 집과 더불어 같은 읍(邑)이고 본관도 같다면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빈촌(貧村)과 부촌(富村)의 류씨(柳氏)라 할 것이니 어찌 약소국(弱小國)인 기(杞)나라와 송(宋)나라가 문헌을 보존치 못한 것을 탄식하겠는가.
昔狄武襄不敢附狄梁公凡譜系失傳之家當引狄武襄爲第一義也今當第四譜修正之日 석적무양불감부적량공범보계실전지가당인적무양위제일의야금당제사보수정지일 始祖完山伯十九世孫副司果南珪謹撰識之時蒼龍丙子夏 시조완산백십구세손부사과남규근찬식지시창룡병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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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같은 적씨(狄氏)인데 가난한 적무양 청(靑)의 집안이 부자인 적양공 인걸(仁傑)의 집안에 감히 끼지 못했으니 보계(譜系)를 잃은 집안에서는 마땅히 적무양의 고사(古事) 인용이 제일 옳은 길이다. 이제 네 번째 족보를 수정하는 날에 시조 완산백 19세손 부사과 류남규(柳南珪)가 삼가 기록하여 알리니 때는 고종13(1876)년 여름이다.